7월 28일부터 9월 30일까지 서울 성수동에 있는 우란문화재단에서 진행되는 ‘그때의 사물’ 전은 한국 근대 시기의 공예를 통해 시대상과 전통을 조명하는 자리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조선은 근대라는 이름의 새로운 시간으로 진입한다. 서양의 신문물이 밀려 들어온 이 시기의 공예품에는 현대적인 미감의 디자인 개념이 덧붙여졌고, 단순 기술자에 머물던 장인들은 자신의 독창성을 드러내는 작가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전시를 기획한 김민정씨는 “공예 분야에 있어 근대는 단순히 과거의 한 시점을 넘어 전통과 현대, 자주와 식민, 수공업과 산업화 등 다층적 시대상이 투영된 복합적인 전환점이라 대한제국의 근대화 노력과 일제강점기의 식민 정책 속에서 전통 공예는 변화와 변질 사이 수많은 변화를 경험해야 했다”면서 “때문에 이 시기의 사물들을 단순한 유물이 아닌,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이념의 갈등 속에서 탄생한 ‘시대적 결과물’로 바라보고 오늘날 전통 공예의 의미를 다시 찾아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작자 미상 ‘갑게수리’. [사진 우란문화재단]
예를 들어, 이름도 낯선 ‘갑게수리(왜궤)’는 장방형의 소형 궤로 조선시대에 귀중품을 보관하기 위해 사용한 일종의 작은 금고다. 단단한 판재와 육중한 경첩, 견고한 자물쇠앞바탕장석을 갖춘 구조인데 내부는 크고 작은 서랍들로 구성돼 있다. 왜궤(倭櫃)라는 별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 기원은 일본으로 추정된다. 16세기 무렵 서양과의 직접 교역을 통해 일본이 들여온 금고 문화를 조선이 다시 수용한 것이 바로 갑게수리로 우리의 전통적인 목공예 기술에 서양의 금고라는 기능성과 구조에 관한 새로운 인식이 덧붙여진 예다.
‘나전 칠 꽃 나비무늬 찬합’은 조선 후기 자개 세공이 근대적 디자인 감각과 결합해 상품으로 제작된 예다. 흑칠한 표면에 꽃과 나비를 자개로 장식했는데, 밥과 반찬 등의 음식을 담아 이동하는 기능성까지 고려해 자개 문양이 각 층마다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배치됐다. 전체적인 형태 또한 보관과 진열을 동시에 고려한 구조로 설계됐다. 김민정씨는 “무엇보다 이 찬합은 단순히 전통 기술을 반복한 것이 아니라, 근대적 상품 구성과 시각적 연출에 맞춰 철저히 디자인된 공예품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했다.
이왕직미술품제작소의 ‘동제 동물모양 공예품’. [사진 서울공예박물관]
‘동제 동물모양 공예품’은 조각과 공예의 교차점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통 세공의 정교한 기법을 계승하면서도 입체적 조형성과 기능적 장식성을 겸비한 근대 공예의 복합적 성격을 보여준다. 금속을 단순히 성형하거나 장식적으로 다루는 것을 넘어 입체적 형상과 사실적 디테일, 재현보다는 상징적 묘사에 가까운 표현법 등을 미루어 보면 서양의 조각 언어를 차용했음을 알 수 있다. 즉, 공예와 조각이라는 서로 다른 장르의 경계선이 근대에 교차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성운의 ‘문자도 나전상자’. [사진 우란문화재단]
이성운 나전 작가의 ‘문자도 나전상자’는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를 주제로 물·돌·소나무·대나무·달을 상징하는 글자와 자연물을 섬세한 나전 기법으로 표현한 작품인데 유교적 군자의 도리를 나전이라는 시각적 아름다움으로 표현한 기술도 아름답지만 과감하고 독창적인 표현법이 현대적이라 놀랍다. 이성운 작가는 통영 나전칠기의 당대 명장들과 교류하며 익힌 전통 기술을 바탕으로 강창원, 이중열, 이중섭, 장윤성 등 현대 미술가들과도 교류하며 현대적인 디자인 감각을 익혔기 때문이다. 특히, 이 작품에 사용된 후패(옛날 자개)는 요즘은 볼 수 없는 것이라 더욱 귀하다. 자개를 도안에 따라 오려내고 줄칼로 다듬어 칠면에 붙이는 것을 ‘주름질’ 기법이라고 하는데 요즘은 이렇게 큰 자개를 구할 수 없다고 한다.
전시에는 김봉룡, 김태희 등 국가무형유산 제10호 ‘나전칠기’ 분야 기능보유자들의 작품과 박선호, 주세균, 최해리 등 현대 작가 11인의 작품이 함께 전시됐다. 장인들의 작품은 근대를 관통하며 전통이 현대로 이어지는 시기에 고민했던 결과물을 보여준다. 현대 작가들은 전통 재료에 현대적인 미감을 더하거나, 전통 기법을 새로운 형태로 변용하는 시도를 통해 전통 공예의 새로운 가치와 전통에 대한 근본적 의미를 고민한 결과물을 보여준다.
다만, 칠기와 책거리, 달항아리 등 전시 작품의 장르가 여러 종류인 데다 근대 유물과 현대 작가의 작품들이 일련의 흐름 없이 뒤섞여 있어 전시장 구성은 조금 산만하다. 또 유물 자체만 보아서는 ‘그때’의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 한눈에 간파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전시 작품 옆에 붙은 안내문을 먼저 읽어볼 것을 권한다. 작품과 시대상을 꼼꼼하게 짚어낸 안내 책자를 길잡이 삼는 것도 전시를 알차게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이다.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후 4시에 운영되는 전시 해설 프로그램을 이용해도 좋다. 사전 신청 시 별도 해설도 제공된다. 자세한 내용은 우란문화재단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무료 관람.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